베끼기의 역사, 그리고 D램 파티의 끝

앤스로픽이 2월 23일, 딥시크·문샷AI·미니맥스 등 중국 AI 기업 3곳을 공개 지목했다. 허위 계정 2만 4천 개를 통해 자사 모델 클로드와 1,600만 건 이상의 대화를 생성하고, 그 응답 데이터를 자체 모델 훈련에 전용했다는 것이다.
핵심은 '증류(distillation)'다. 상위 모델의 추론 과정을 하위 모델의 학습 데이터로 전환하는 기법으로, 본래는 자사 모델의 경량화에 쓰인다. 그런데 중국 기업들이 이 기법을 경쟁사 모델에 대규모로 적용했다는 것이 앤스로픽의 주장이다. 오픈AI도 같은 경고를 미 하원에 전달한 바 있고, 미국 행정부 고위 관료 역시 딥시크의 최신 모델이 미국 주요 AI 기업들의 모델을 증류한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다.
앤스로픽은 이를 국가 안보 위협으로 규정하며 반도체 수출 통제 강화를 촉구했다. 다리오 아모데이 CEO는 엔비디아 칩의 중국 수출 허용을 두고 "북한에 핵무기를 파는 것과 같다"고까지 표현했다.
타당한 우려다. 그러나 이 프레임만으로는 현상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Reverse Engineering의 계보: 한국 전자산업의 성장 공식
기술 후발주자의 성장 경로에서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는 예외가 아니라 표준이었다. 한국 전자산업이 그 대표적 사례다.
1) 반도체
삼성전자는 2010년대 초반 gate length 전쟁 당시, 도시바(Toshiba)의 메모리 칩을 decap—패키지를 화학적으로 제거하고 다이를 노출시켜 회로 레이아웃을 분석—하는 전략을 체계적으로 운용했다. 도시바의 에칭 프로파일이 직각(anisotropic)이면 삼성은 라운드 프로파일로 변형하는 식으로 마스크를 최소한만 수정해 특허를 우회했다. 독자 R&D 비용을 극적으로 절감하면서도 공정 노하우를 빠르게 내재화하는 방법론이었다.
2) 디스플레이
2007년 LG전자에 입사한 내가 처음 받은 업무가 정확히 이것이었다. 당시 세계 최고였던 일본 파이오니아 쿠로 PDP TV를 '벤치마킹'이라는 이름으로 완전 분해했다. 패널과 구동 회로를 분리한 뒤 일본제 회로는 회로 부서에서 가져가고, 선행연구팀은 파이오니아 패널 위에 LG의 구동 알고리즘을 탑재한 FPGA를 직접 설계해서 올렸다. 경쟁사의 하드웨어 위에 자사의 소프트웨어를 얹어 성능 격차를 측정하고, 그 데이터로 자사 제품을 개선하는 구조다. 신입사원이었던 내가 첫 업무로 이것을 맡았을 정도로, 벤치마킹은 조직 깊숙이 내재화된 방법론이었다.

3) 자동차
현대자동차는 2010년대에 매주—강조하건대 매주—BMW, 메르세데스-벤츠, 아우디, 폭스바겐 차량을 입고시켜 완전 분해했다. 나는 이를 직접 목격했다. 오일류, 내장재, 전장부품, 엔진, 변속기—각 기능 부서가 해당 파트를 수거해 소재 분석, 설계 비교, 내구성 테스트를 수행했다. 이것은 비밀 작전이 아니라 공식 프로세스였다.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의 엔지니어링을 해체하고 흡수하는 것이 현대차 R&D의 일상이었다.

도덕의 영역이 아니라 시장의 역학이다
어릴 때는 이런 무임승차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사업을 해보니 관점이 바뀌었다. 내 제품이 시장에서 견인력을 얻자마자 6개월 이내에 동일 카테고리 경쟁 제품이 등장했다. 고객은 그 제품의 정통성이나 개발 이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명품과 같이 사치재가 아닌 다음에야 무조건 성능 대비 가격이 합리적이면 전환했다. 그것이 시장의 작동 원리다.
딥시크나 시댄스(Seedance)가 클로드보다 성능이 우수하고 비용이 낮다면, "중국산이니까 쓰지 않겠다"는 기업이 과연 얼마나 될까. B2B 의사결정에서 원산지 감정은 TCO(Total Cost of Ownership) 앞에서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앤스로픽과 오픈AI의 분노는 정당하다. 약관 위반이고 지적재산의 무단 전용이다. 그러나 산업사의 관점에서 이것은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이다. 미국이 영국의 방직 기술을, 일본이 미국의 자동차 공정을, 한국이 일본의 반도체와 전자 기술을, 중국이 한국과 미국의 것을 흡수했다. 기술 패권의 이동은 언제나 카피의 위에서 시작됐다.

애플의 중국 메모리 검토가 의미하는 것
최근 애플이 YMTC(양쯔메모리)와 CXMT(창신메모리)와의 파트너십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D램과 낸드 가격이 동반 급등하면서, 삼성·SK하이닉스·마이크론의 공급자 우위 구도에 대한 수요측의 반격으로 해석된다. 현재 아이폰 D램의 약 60%가 삼성으로부터 공급되고 있으며, 중국산 메모리는 아직 탑재된 적이 없다.
업계 다수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를 이유로 실현 가능성을 낮게 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단순한 협상 블러핑을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근거는 반도체 산업의 공급 다변화 메커니즘이다.
이 업계에는 오래 반복된 공식이 있다.
수요 기업이 1위 공급사에 원하는 물량이나 가격 조건을 확보하지 못하면, 2위·3위에게 주문이 이동한다.
품질이 열위여도 일단 이동한다. 그리고 수요 기업은 단순히 주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시간을 함께 제공한다. 사실상 "이 자금으로 1위를 따라잡아라"는 위임이다. 그 순간부터 2, 3위 업체는 1위 제품에 대한 적극적 벤치마킹—사실상 역설계—을 통해 가파른 기술 성장 곡선을 그린다.
한국이 정확히 이 경로로 성장했다. 1983년 삼성이 64K D램으로 메모리 시장에 진입했을 때 글로벌 선두 업체들과의 기술 격차는 4년 이상이었다. 그러나 일본 업체들의 칩을 분석하고, 미국·유럽 기업들의 주문을 소화하며 공정 역량을 축적했고, 결국 1990년대 중반에 세계 점유율 1위에 올랐다. 대만의 MediaTek과 TSMC도 동일한 궤적을 밟았다.
지금 CXMT와 YMTC에서 동일한 시나리오가 전개되고 있다. CXMT는 2025년 첫 연간 흑자를 달성하며 상하이에 기존 허페이 공장의 2~3배 규모 신규 팹을 건설 중이다. DDR5와 LPDDR5X 양산에 진입했고, HBM3E 시제품을 화웨이 등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YMTC는 우한 3공장 가동을 1년 앞당겨 2026년 하반기로 조정했으며, 공장 용량의 절반을 D램 생산에 할당하는 사업 다각화까지 추진하고 있다. 두 회사 모두 올해 상장을 통해 수조 원 규모의 투자 재원을 확보할 예정이다.
애플이든 HP든, 빅테크가 중국 메모리에 주문을 넣는 것은 아무리 트럼프가 반대한다고 하지만 결국 시간의 문제다. 그리고 그 주문이 들어가는 순간, 과거 삼성이 도시바 칩을 decap했던 것과 동일한 역학이 작동할 것이다. 주문 기업의 품질 요구와 자본이 후발주자의 기술 도약을 가속시키는 구조다.
그래서 삼성·SK하이닉스 두 회사의 D램 독점 구도는 우리의 기대보다 짧을 것이다.
이것은 두 회사의 역량 부족 때문이 아니다. 메모리 공급이 소수 기업에 집중되어 가격이 상승하는 구조를 글로벌 수요 기업들이 무한정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대는 그들은 반드시 대안을 육성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공급망 메커니즘이며, 반도체 산업 70년 역사가 예외 없이 보여준 패턴이다.
결론: 베끼는 속도보다 빠르게 달리는 수밖에 없다
중국의 AI 증류가 규범적으로 문제인가? 그렇다. 약관 위반이고, 지적재산의 무단 전용이다. 앤스로픽의 방어 체계 강화와 수출 통제 촉구는 단기적으로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산업의 시각에서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예정된 일"이다. 후발주자는 언제나 선두의 산출물을 분석하며 성장했고, 시장은 결과적으로 그것을 수용해왔다. 수출 통제도, 약관 강화도, 결국은 시간을 벌어주는 도구일 뿐 근본적인 해자(moat)가 되지 못한다.
한국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베끼는 후발주자"였기 때문이다. 도시바가 삼성에게 추월당한 것을 삼성이 CXMT에게 반복하지 않으려면, 역설계가 불가능한 수준의 기술 격차를 유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전략이다. HBM4, 1c나노 이하 공정, CXL 메모리—추격자가 카피할 수 없는 영역으로의 도주만이 답이다.
AI도 동일한 구조다. 앤스로픽이 증류 방어벽을 세우는 것은 전술이다. 하지만 전략은 따로 있다. 증류해도 재현할 수 없는 수준의 모델 아키텍처와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 결국 기술 패권의 본질은 방어가 아니라 속도다.
역사는 반복된다. 이기는 것은 베끼는 자가 아니라, 베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자다. (그리고 그 속도를 세계 경제가 받쳐 줄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하겠지만 이것은 나중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기사 원문
References
- 메모리 가격 오르자, 한국 대신 중국 업체 손잡으려는 애플 — 조선비즈, 2026.02.19
- 中 메모리 칩 공세… CXMT·YMTC, 삼성·SK하이닉스 맹추격 — 글로벌이코노믹, 2026.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