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전성기는 짧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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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품 산업에서 1위가 독주하면 시장이 1위에게 수렴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순간부터 구매자가 단일 의존을 못 견뎌 2·3위를 발굴하고 육성하며, 이 킹메이킹이 1위를 뒤집는다. 지금 CXMT를 키우는 건 베이징이 아니라 애플과 HP와 바이트댄스이고, 규제는 파는 쪽을 겨냥하도록 설계돼 있어 사는 쪽의 이 움직임을 막지 못한다.

#반도체#HBM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왕은 구매자가 만든다

한국 반도체 독주 체제가 생각보다 짧을 수 있는 이유

지난 8월 초, 중국 관영 매체가 애플과 창신메모리(CXMT)의 모바일 D램 공급 협상이 깨졌다고 보도했다. 국내 기사 제목은 "삼전닉스보다 비싸게 달라고 해서 무산" 같은 식으로 대체로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중국산 D램이 아직 한국을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고 애플은 결국 한국 기업에게 돌아온다는 느낌을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반대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플은 원가를 줄이려고 CXMT에 간 것이다. 그런데 CXMT가 삼성·SK하이닉스와 같거나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상황이 되었다. 창신메모리의 물량은 화웨이와 샤오미가 대부분 선점했고, 지난달에는 바이트댄스가 5년 70억 달러, 그 이전에는 텐센트가 30억 달러를 걸었기 때문에 창신메모리는 애플에 가격을 할인해 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애플은 협상이 깨진 뒤에도 아이폰과 맥북에 CXMT D램을 계속 시험 적용하고 있고 미국 정부에는 승인을 요청하는 중이다. 즉 애플에게 이번 건은 애초에 가격 문제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애플은 할인을 사려던 게 아니라 옵션을 사려던 것이고, 옵션에는 프리미엄을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1위의 독주는 독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이런 판단을 하는 데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 부품 산업에서 오래 반복되어 온 구조가 하나 있기 때문이다.

1위가 압도적으로 앞서 나가면 시장이 1위에게 수렴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순간부터 구매자가 2·3위를 발굴하고 육성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위가 뒤집히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걸 편의상 "킹메이킹"이라 부르고자 한다. 여기서 핵심은 시장의 왕을 만드는 주체가 후발주자 자신도 정부도 아니라, 부품을 사서 제품을 조립하는 구매자라는 점이다. 부품 산업의 판도가 어떻게 돌아가든 조립업체는 자기 생산 라인이 멈추는 것을 기다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패턴은 계속되고 있고, 한 번 작동하기 시작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

지금 CXMT를 키우는 건 베이징이 아니라 애플과 HP와 바이트댄스다. 이 사실이 왜 결정적인지는 뒤에서 따로 다루겠다. 먼저 메커니즘부터 보자.


킹메이킹은 네 단계로 작동한다

첫째, 1위의 독주는 구매자에게 원가 문제가 아니라 생존 문제가 된다

한국 대기업만 하더라도 90년대부터 부품 이원화는 이미 일반적인 정책이었다. 단일 벤더 의존도가 일정 선을 넘으면 사업 전체가 위기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글로벌 1티어 기업들이 회사 하나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 나간 생각이다.

그래서 이 지점을 넘어서면 구매자의 판단 기준이 바뀐다. 최저가보다 공급 확실성이 위로 올라온다. 더 비싸도, 성능이 조금 모자라도 2위와 3위를 살 이유가 생긴다는 뜻이다.

둘째, 후발주자를 들이는 비용은 호황기에만 정당화된다

신규 벤더를 승인 벤더 목록에 올리는 데는 1~2년과 실제 엔지니어링 자원이 든다. 평시에는 수지가 맞지 않아 아무도 함부로 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공급 부족이 오면 이 계산이 통째로 뒤집힌다. 인증을 안 하면 라인이 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호황은 후발주자가 스스로 지불할 수 없는 진입 비용을 구매자가 대신 내주는 구간이라고 봐야 한다.

셋째, 한번 뚫린 채널은 되돌아가지 않는다

호황은 끝난다. 그런데 한 번 뚫린 공급 채널은 다음 사이클에 그대로 재사용된다. 닛케이 보도대로 주요 PC 업체 대부분이 올해 중반 CXMT 인증 절차를 마쳤다면, 가격이 정상화돼도 그 사실 자체는 남는다.

그래서 호황 한 번마다 후발주자의 지위는 한 칸씩 올라가고, 그 위치는 좀처럼 다시 내려가지 않는다.

넷째, 1위는 스스로 후발주자가 들어올 자리를 비운다

호황이 오면 1위는 프리미엄 제품으로 이동한다. 한정된 캐파를 이익이 크고 기술 격차를 벌릴 수 있는 라인업에 집중하는 것이니 그 자체로는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그 결과 범용 구간에 공백이 생긴다.

HBM 1기가바이트는 DDR5 대비 약 3배의 웨이퍼 캐파를 먹는다. HBM으로 옮길수록 범용에 쓸 웨이퍼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후발주자는 그 공백에서 현금 흐름과 규모를 얻고, 그 돈으로 위로 올라온다.


일관된 역사

1980년, IBM

인텔은 IBM PC의 프로세서 소켓을 따냈다. 당시 인텔은 연매출 10억 달러가 안 되는 회사였고 IBM은 내가 대학에서 배운 교과서에 나오던 바로 그 킹 IBM이었다. 그리고 이 킹에게는 오래된 조달 원칙이 하나 있었다. 핵심 부품은 공급처가 둘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가격 협상용이 아니었다. 제품 라인 하나를 통째로 거는 부품을 회사 한 곳에 맡길 수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고, 인텔이 작은 회사였기 때문에 그 걱정은 더 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조건이 붙었다.

우리 소켓을 원하면 너를 대신할 수 있는 회사를 하나 만들어라.

인텔은 이 조건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인텔이 x86을 남에게 줄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1976년에 AMD와 맺어둔 기술 교환 협정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8080·8085 같은 이전 세대까지였고, x86은 인텔 독점으로 남길 계획이었다.

그 계획이 IBM 때문에 깨졌다. 이원화 후보로 AMD를 지목한 것도 IBM이었다. 인텔의 밥 노이스가 직접 AMD의 제리 샌더스를 찾아갔고, 1981년 10월에 76년 협정을 10년 연장하는 합의가 발표됐다. 이듬해 2월의 기술교환협정으로 AMD는 8086과 8088, 나중에는 286까지 만들 권리를 얻었다.

AMD는 1969년부터 있던 회사이고 애초에 남의 설계를 대신 생산해 주는 세컨드 소스 전문 업체가 창업 모델이었다. 그러니 IBM이 AMD를 만든 것은 아니다. IBM이 만들어 준 것은 AMD의 x86 지위이고, 이후 30년의 경쟁 구도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인텔은 소켓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경쟁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조건을 붙인 건 시장이 아니라 고객이었다.

1986년, 미일 반도체협정

미일 반도체협정이 일본산 D램에 가격 하한을 걸자 1987~88년 미국에 심각한 D램 부족이 왔다. 미국 세트업체들은 일본이 아닌 소스를 절박하게 찾았고, 그 창으로 국내 기업들이 들어갔다.

한국 반도체의 시작은 기술 돌파가 아니라 미국 구매자의 리스크 회피였다고 봐야 한다.

2005년, 애플과 낸드

아이팟 나노를 출시하면서 애플은 낸드 5개사에 약 12.5억 달러를 선지급했다. 물건을 받기 전에 돈을 먼저 준 것이다. 낸드 회사들은 그 돈으로 라인을 늘렸고 애플은 그 라인의 물량을 확보했다. 당시 세계 낸드 생산량으로는 아이팟 나노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매자가 공급자의 설비 투자를 대신 대준 셈이다.

2013년, HBM

HBM을 SK하이닉스와 함께 설계한 건 AMD였다. 자사 GPU의 메모리 대역폭이 막혀 있었기 때문이고, 규격을 함께 만들 파트너로 2위를 골랐다.

그런데 이 규격을 돈으로 바꿔 준 건 AMD가 아니라 엔비디아였다. AI 가속기 수요가 터지면서 엔비디아가 HBM의 지배적 구매자가 됐고, SK하이닉스는 그 물량 위에서 1위로 올라섰다. 2025년 1분기에 삼성이 1992년 이래 33년 만에 처음 자리를 내줬고, 연간 영업이익도 SK하이닉스 47.21조 원이 삼성 43.6조 원을 사상 처음 앞질렀다.

33년 독주를 뒤집은 힘은 하이닉스의 기술이 아니라 구매자의 선택이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한국에게 CXMT는 위협의 서사지만, 우리 자신이 이 메커니즘의 최대 수혜자였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다.


왜 하필 전자부품인가

이 구조는 모든 산업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전자부품에서 유독 선명하다. 세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표준이 대체 가능성을 제도로 강제한다

JEDEC 규격 덕분에 D램은 벤더를 바꿔도 보드를 다시 설계하지 않는다. 애초에 세컨드 소스라는 관행 자체가 이 업계가 만든 것이다. 항공 부품은 인증에 수년이 걸리고 기체 수명 30년 동안 단일 소스로 고정된다. 킹메이킹의 물리적 전제가 없다.

물량이 곧 수율이다

후발주자의 진짜 병목은 도면이 아니라 웨이퍼를 충분히 흘려 학습곡선을 타는 것이다. 즉 구매자가 물량만 주면 기술 격차가 저절로 좁혀진다. 킹메이킹의 단가가 극도로 싸다는 뜻이다. 주문서 한 장이 R&D 수년치를 대체한다.

기회가 자주, 그리고 크게 온다

세트 수요 10% 변동이 부품 주문 50% 변동으로 증폭되는 것이 이 산업의 특성이다. 게다가 제품 수명주기가 12 ~ 18개월이라 신모델마다 벤더 재선정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후발주자가 인증을 뚫을 기회가 20년에 한 번이 아니라 3 ~ 5년마다 돌아온다.

여기에 구매자 집중도까지 높다. 애플, 델, HP, 엔비디아, 하이퍼스케일러 몇 곳이 물량을 쥐고 있으니 단일 구매자 하나가 후발주자를 규모경제 임계점 위로 던져 올릴 수 있다.

같은 패턴은 반도체 밖 전자부품에서도 반복된다. 패널이 대표적이다. 샤프에서 삼성·LG디스플레이로, 다시 BOE로 넘어간 세 번의 세대교체가 전부 패널 부족 국면에 구매자가 대안을 인증한 결과였다.


정부 규제로도 막기 어렵다

최근 국제 정세를 보면 이 경쟁의 결말을 미국 정부가 정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규제 문서를 실제로 뜯어보면 겨냥하는 대상과 움직이는 주체가 어긋나 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는 거의 전부 공급자를 향한다. 장비 수출통제, 해외직접생산품규칙, 엔티티 리스트, AI 칩 성능 임계까지 전부 "중국에 파는 행위"를 규율한다. 그런데 킹메이킹은 "중국에서 사는 행위"다. 미국 민간 기업이 CXMT 메모리를 구매하는 것 자체는 지금도 금지되어 있지 않다.

수요측 규제가 아예 없지는 않다. 다만 적용 대상이 연방 조달이다.[1] 아이폰이 아니라 델과 HP가 정부에 파는 노트북이 대상이다. 세계 D램 수요에서 미국 연방 조달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이건 방벽이 아니라 울타리다. 게다가 이행규칙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국방부는 CXMT를 목록에서 제외하는 고시를 냈다가 철회한 적도 있다. 규제 당국조차 이 목록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애플의 조달 결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 구멍은 미국 정부의 의지 문제가 아니다. 수요측 규제는 구조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감시할 대상이 너무 많다

수출통제가 작동하려면 규제 대상이 손에 꼽을 만큼 적어야 한다. 장비는 그 조건을 만족한다. 반도체 제조장비는 사실상 다섯 회사가 나눠 갖고 있고 그 회사들은 네덜란드와 미국과 일본에 있으니, 세 나라 정부가 합의하면 장비 공급을 조절할 수 있다.

메모리를 사는 쪽에는 그런 지점이 없다. D램을 사는 회사는 수천 곳이고 관할권은 전 세계다. 브라질에서 팔린 노트북 안의 D램이 어디서 왔는지 일일이 확인할 방법도 없다. 규격이 같고 라벨이 없고 유통을 여러 번 거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애플이나 HP가 직접 사지도 않는다. 폭스콘과 콴타와 컴팔이 부품표를 짜기 때문에 브랜드를 규제해도 실제 구매 행위는 대만·중국 기업의 계약서 안에 있다.

여기서 지독한 대칭이 하나 나온다. 표준화는 킹메이킹을 가능하게 하는 성질인 동시에 규제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성질이다. 규제로 막으려면 표준을 깨야 하는데, 표준을 깨면 산업이 멈춘다.

자국이 더 아프다

메모리가 남아돌 때는 아무도 굳이 CXMT를 찾지 않는다. 그래서 그때는 중국산을 사지 말라는 명령을 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명령이 실제로 무언가를 막는 순간은 공급이 부족해서 CXMT가 유일한 대안이 됐을 때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이 명령은 구매 기업과 소비자에게 이렇게 번역된다.

노트북 생산을 줄여라. 신제품 출시를 미뤄라. 부족한 메모리를 더 비싸게 사라.

비용을 무는 쪽이 중국 기업이 아니라 자국 기업과 자국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장비 통제와 정확히 반대다. 그쪽은 남만 아프게 하는 조치라 정치적으로 싸지만, 수요측 규제는 상대보다 내가 더 아프다. 가장 필요한 시점이 가장 밀어붙이기 어려운 시점이 된다.

오히려 킹메이킹을 가속하는 면이 있다

EUV를 막는 것처럼 공급측 규제는 CXMT의 기술 속도를 늦춘다. 그런데 동시에 이 규제가 CXMT의 물량을 보장해 주는 면이 있다. 중국 세트업체 입장에서 미국 규제는 한국·미국 메모리 의존이 언제든 정치적으로 끊길 수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지금 국산을 써 둘 이유가 생긴다. 화웨이와 샤오미가 CXMT 물량을 선점하고 바이트댄스와 텐센트가 수십억 달러를 거는 배경이 이것이다.

앞에서 정리했듯 이 산업에서 물량은 곧 수율이다. 규제가 기술을 늦추는 동시에 학습곡선을 밀어주고 있으니 순효과가 어느 쪽인지 단언하기 어렵다.

자본 경로도 열렸다. CXMT는 지난 7월 상하이 STAR 마켓 상장에서 85.6억 달러를 조달했다. 2026년 아시아 최대 규모였고 상장 첫날 주가는 472% 올랐다. 세계 점유율 8% 회사가 4,890억 달러 가치를 받은 것이다. 밸류에이션이 타당한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규제로 마르게 하려던 자금이 자국 자본시장에서 채워졌다는 사실은 남는다.

애플이 허락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이것이다. 애플은 CXMT 채택에 앞서 미국 정부의 지지를 구하고 있다.

법으로 금지돼 있다면 허락을 구할 대상이 없다. 허락을 구한다는 건 금지가 아니라 정치적 리스크라는 뜻이고, 정치적 리스크는 협상 가능하다.

그래서 결과가 어느 쪽으로 나든 방향은 같다. 승인되면 킹메이킹이 공식 승인을 받고 다른 미국 기업들에 선례가 된다. 거부되면 애플은 중국 내수용 기기에만 CXMT를 쓴다. 보도된 협의 내용이 정확히 그것이다. 어느 쪽이든 물량은 흐른다. 규제는 지리적 분할선을 그을 뿐 킹메이킹을 멈추지는 못한다.


그러나 전자부품이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만 쓰면 비관론이 된다. 이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 구간도 분명히 있다. 표준화와 물량 학습, 두 조건이 성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ASML의 EUV 독점은 20년째 더 강해지고 있다. 인텔도 삼성도 TSMC도 대안을 원하지만 만들지 못한다. 물량으로 좁혀지는 격차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지노모토의 ABF 빌드업 필름도 사실상 단일 소스다. 레시피 노하우형은 주문서로 복제되지 않는다.

선단 파운드리도 그렇다. 애플은 2015년 A9을 TSMC와 삼성에 이원화했다가 특성 편차 논란을 겪고 TSMC 단일 소스로 회귀했다. 대형 구매자가 킹메이킹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례다. PDK와 설계 이식 비용 때문에 표준화 조건이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선명한 반례는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앞에서 본 인텔 사례의 후반부다.

1986년에 인텔은 386을 자기만 팔기로 하고 세컨드 소스 라이선스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고든 무어는 이 결정을 두고 업계가 돌아가던 방식의 실질적 변화였다고 회고했다. 뒤집어 말하면 그때까지 세컨드 소스는 관행이 아니라 제도였다는 뜻이다. 인텔이 그걸 깼고, 정확히 그 시점부터 20년 독점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한 회사의 역사 안에 양면이 다 있다. 1982년은 킹메이킹이 작동한 국면이고 1986년은 1위가 그 루프를 빠져나간 국면이다. 빠져나갈 수 있었던 조건은 하나였다. 인텔은 아키텍처를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서 메모리와의 결정적 차이가 나온다. x86은 인텔의 것이었지만 JEDEC은 삼성의 것이 아니다. 인텔에게는 표준을 닫는다는 선택지가 있었고 우리에게는 그 선택지 자체가 없다.

정리하면 이렇다.

표준화된 대량생산 전자부품에서는 1위의 독주가 곧 2·3위의 부상 조건이 된다. 구매자가 단일 의존을 감당할 수 없고, 표준이 교체를 가능하게 하며, 물량이 기술 격차를 대신 메워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하우와 커스텀 통합이 지배하는 구간, 혹은 1위가 표준 자체를 소유한 구간에서는 독주가 그대로 독점으로 굳는다.


한국은 어느 쪽에 서 있는가

범용 D램은 두 조건을 완벽하게 만족한다. 그래서 이미 벌어지고 있다.

옴디아 기준 CXMT의 2026년 1분기 매출은 25억 달러에서 73억 달러로 약 3배가 됐다. 점유율은 4.7%에서 7.6%로 올랐고 성장률 195.7%로 주요 업체 중 1위, 전체 순위 4위다. 그런데 여전히 HBM 구간에는 없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위 구조의 결과다. CXMT가 범용에서 폭발하고 HBM에서 부재한 것은 표준화 조건이 한쪽에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의 방어선은 기술이 앞선다는 게 아니다. HBM을 표준화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가다. 표준화가 진행되는 순간 같은 루프가 그대로 작동한다.

그런데 HBM은 JEDEC 규격이다. HBM4에서 베이스 다이가 로직 파운드리로 분리되면서 스택 조립과 로직이 갈라지는 중이고, 분리는 모듈화이며 모듈화는 대체 가능성이다. 조건이 스스로 충족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1986년의 인텔이 쓸 수 있었던 카드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사실이 다시 걸린다. 인텔은 표준을 닫아 버릴 수 있었지만 우리는 표준을 만드는 협의체의 참여자일 뿐 소유자가 아니다. 닫을 문이 없는 쪽이 문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전성기는 짧을 수 있다

결론은 순위가 아니라 마진으로 말해야 한다.

엘피다는 파산 신청 당시에도 D램 3위였고 도시바는 낸드 2위인 채로 메모리 사업을 팔았다. 둘 다 순위를 잃어서 죽은 게 아니라 순위를 유지한 채 마진을 잃어서 죽었다. 순위는 마지막에 무너지는 후행 지표다.

지금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률은 약 72%로 사상 최고다. 이 마진은 방어 가능한 해자가 아니라 공급 부족이 만든 한시적 지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이번 사이클이 과거보다 빠를 이유가 세 가지 있다.

1. 킹메이킹에 들어가는 자본의 규모가 달라졌다

앞에서 본 2005년 애플의 낸드 선지급과 지금 중국 하이퍼스케일러들의 장기 계약은 성격이 같다. 5년치 물량이 잠기면 CXMT는 그 계약서를 들고 팹을 짓는다. 수요가 확정돼 있으니 자금이 붙는다.

다른 건 규모다. 애플은 낸드 다섯 회사에 나눠 12.5억 달러를 걸었지만 바이트댄스는 CXMT 한 곳에 70억 달러를 걸었다. 회사당으로 환산하면 스무 배가 넘는다.

2. 치킨게임의 조건이 달라졌다

D램은 불황이 오면 가격이 원가 밑으로 떨어진다. 이때 감산하는 게 상식 같지만 업계는 반대로 간다. 경쟁사가 먼저 무너지면 그 물량을 나눠 갖고 다음 호황에 회수할 수 있기 때문에 적자를 감수하고 오히려 증산하는 것이다. 마주 보고 달리는 자동차 같다고 해서 치킨게임이라 부른다.

이 게임에서 패배한 회사들이 실제로 있다. 독일 키몬다가 2009년에 파산했고 일본 엘피다가 2012년에 무너져 마이크론에 넘어갔다. 순위는 호황이 아니라 이런 순간에 뒤집혔다. 삼성이 1위가 된 것도 남들이 견디지 못한 구간을 견뎌 냈기 때문이다. (견뎌낸 방식이 건전했느냐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CXMT에는 이 시합이 다르게 적용된다. 키몬다와 엘피다는 주주와 은행에 설명해야 했고 적자가 길어지면 자금이 끊겼다. CXMT의 자금은 상당 부분 국가에서 나온다. 적자가 몇 년 이어져도 라인이 멈추지 않는다면 버티기 시합의 승패 조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3. 초기 물량을 받아 줄 시장이 안방에 있다

메모리는 처음 만들 때 수율이 나쁘다. 웨이퍼를 계속 흘려 불량 원인을 하나씩 잡아야 원가가 내려간다. 그러려면 초기의 덜 좋은 물건을 사 줄 구매자가 있어야 한다. 이게 후발주자의 진짜 관문이다.

일본도 한국도 그 물건을 미국 시장에 팔아야 했다. 미국 구매자는 언제든 다른 데서 살 수 있었으므로 품질이 안 나오면 그냥 안 샀다. 삼성이 1980년대 내내 적자를 본 이유가 이것이다.

CXMT의 조건은 다르다. 중국 세트업체들은 한국·미국 메모리를 언제까지 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면 지금 품질이 조금 못해도 국산을 써 두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초기 물량을 받아 줄 시장이 안방에 있고, 그 시장을 만들어 준 것이 미국 규제다.


그러나 과거와 다른 조건도 있다

반대편도 봐야 공정하다. 이번 사이클에는 과거 전환기에 없던 비대칭이 하나 있다. EUV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오던 시기에 한국은 장비 접근이 완전했다. 돈만 있으면 최신 장비를 살 수 있었다. CXMT는 그럴 수 없어서 DUV로 여러 번 나눠 찍어야 하고, 이건 웨이퍼 한 장당 공정 수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캐파는 늘릴 수 있어도 비트당 원가에서 앞서기는 어렵다.

HBM은 더 그렇다. 12단, 16단으로 쌓으면 각 층의 수율이 곱해지기 때문에 하나만 나빠도 전체가 무너진다. 베이스 다이는 선단 로직 공정이 필요한데 그 경로도 막혀 있다. 이 글의 기준으로 말하면 HBM은 아직 표준화 구간이 아니라 노하우 구간에 가깝다.

그리고 한국에는 도시바와 엘피다에게 없던 것이 있다. 자본이다.


진짜 위험은 연결부에 있다

그런데 위 세 가지를 다 인정해도 남는 문제가 있다. HBM 캐파를 짓는 돈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범용 D램에서 나온다. 삼성과 SK하이닉스 D램 생산의 절반 이상이 여전히 범용이다. HBM에서 이기고 있어도 범용 쪽 마진이 먼저 마르면 다음 노드에 들어갈 돈이 없어진다.

엘피다가 정확히 그렇게 죽었다. 3위 자리를 지킨 채로, 다음 세대에 투자할 자금을 구하지 못해 무너졌다. 순위는 마지막에 떨어졌다.

그러니 지켜봐야 할 것은 CXMT가 삼성을 몇 위로 밀어내는가가 아니다. 범용 D램의 마진이 언제부터 HBM 투자를 받쳐주지 못하게 되는가다. 그 시점은 순위 역전보다 훨씬 먼저 온다.


[1] FY2023 국방수권법 5949조는 SMIC·CXMT·YMTC와 그 계열사가 만든 반도체를 '적용 반도체'로 정의하고 연방기관이 이를 포함한 전자제품을 조달하는 것을 금지한다. 시행일은 2027년 12월 23일이며 FAR 이행규칙은 2026년 2월 제안, 4월 의견수렴 종료 후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별도로 국방부 1260H 지정이 2026년 6월 복원되어 국방부 조달이 막혔고 2027년 6월부터는 CXMT 부품이 들어간 완제품까지 간접 금지가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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