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시리즈 1화, 머리가 아픈 K-에자일

편집장·

"오늘우리는"은 오늘 갑자기 제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공유합니다.

#오늘우리는

K-에자일

나는 이 글을 읽고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원문을 읽어봤습니다. 직접 상황에 처해보기도 해서 매우 공감하게 됩니다. 글에서 지적하신 문제가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전통적인 조직 구조가 가지는 의미를 무시하고 K-애자일이 한국에 이식되면서 발생한 문제라고 봅니다. 대기업에서 PO와 유사한 업무를 하는 사람이 본부장입니다. 이전 회사에서 없던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토스 이승건 대표가 PO를 강조하면서 저는 문화적으로 조금 뒤틀렸다고 봅니다. 댓글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나중에 저도 관련해서 글을 한번 써보겠습니다. 발전을 위해서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면 적으로 몰리기 쉬운 때에 좋은 글을 써주셔서 저는 좋았습니다.

그래서 에자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K-에자일의 시작

미제라면 양잿물이라도 마신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본질은 단순하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 기준을 세워 따지기보다, 잘 알려진 사실 하나로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나에게 에자일이 그러하다.

2010년, 벌써 16년 전이다. LG전자 MC사업부 산하 MC연구소 — 핸드폰 만들던 본부의 연구부서 — 에서 에자일을 도입하기로 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MC연구소 인원이 최소 3000명에서 많을 때는 4000명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서 그 정도 규모의 기업 연구소는 드물다. 그중 김OO 실장님 밑에 대충 1000명쯤 있었을 것이다.

이런 대규모 조직에서 에자일을 도입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래야 SW 잘 만들 수 있다고 하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이 이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잘 되었다면 LG전자의 스마트폰이 여전히 판매되고 있을 것이다. 내 옆 셀에 있던 파트가 에자일 마스터를 전담하던 팀이었고, 나 역시 그 당시 인터랙션 관련 프로젝트를 MC연구소와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 상황이 돌아가는 건 듣고 보고 느낄 수 있었다.

IBM에서 PMP 교육을 받고 캐스케이드 방식을 현업에서 지독하게 훈련받은 내가 봤을 때 에자일은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가까웠다. 나는 그들이 에자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망할 것이라는 걸 논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역사에 다 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관리 프로세스의 역사

1960년대, 소련과 미국이 우주 산업으로 경쟁하던 때다. 대규모 프로젝트를 관리해야만 했고, 그래서 산업 표준이 만들어졌다.

PMBOK의 기초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토목공사와 전쟁이다.

인간 관리는 군대에서, 업무 관리는 토목공사에서 가져왔다. 왜일까? 그게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장 많이 죽고, 가장 많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쌓아올린 지식이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들을 모아서 어떤 산업에도 적용할 수 있는 표준으로 발전시켰다. 산업계는 그렇게 수십 년간 프로젝트 관리 기법을 고도화시켜온 것이다.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이 혐오하는 워터폴 방식의 FM은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관리 방법 중 가장 인간을 잘 이해하는 방식이다.


한국의 실정

당시 한국의 실정은 어땠을까? 물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때도 지금의 K-에자일처럼 K-워터폴이 나타났다.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 정의에서 말도 안 되는 개발일정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가 진행되었고, M/M 기반 인건비 책정으로 인형공장에서 눈알 붙이는 사람들처럼 개발자들의 단가가 정해졌다.

그러면서 K-워터폴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만의 독특한 조직문화가 생긴다.

1. 좋은 게 좋은 거

요구사항 도출/정의라는 개념은 없다. 그냥 없다고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LG전자 CTO 정도면 한국 사회에서 지식적으로 상위권 사람들이 모여있는데도 답이 없었다. 프로젝트는 욕망으로 만들어지고, 프로젝트가 끝나는 시점에 욕망이 충족되면 좋은 것이었다.

2. 빨리 빨리

요구사항 정의가 안 되어있으니 일정 역시 고무줄인 것이 자연스럽다. 갑은 급하면 화장실로 뛰어가서 바지를 벗고 변기에 앉는 것이고, 안 급하면 계속 누워서 TV 보는 것과 같았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모든 일정을 ASAP로 처리하는 것이 마음 편한 상태가 된다.

3. 대충 대충

논리적 귀결이다. 모든 일을 ASAP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모호한 요구사항 아래에 최대한 그 일을 책임지지 않을 만큼만 일을 해야 한다. 회사 내부라면 KPI를 정할 때 회사에 필요한 일이 아니라, 자기가 하기 좋은 일로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행태가 만연했다.

4. 끼리 끼리

조엘 스폴스키가 말한 것처럼 "B급 인재는 절대 A급을 채용하지 않는다."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전투력이 안 나오는 일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그리고 그런 사람일수록 알아듣기 힘든 말을 쓴다. 사실 이것이 판교어의 시작이다.


여기까지가 SM/SI로 대변되는 한국 IT의 단면이고 전통적 조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PMBOK에 맞지 않는 부작용이 많은 기업 현상이었지만, 뚜렷한 욕망과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프로젝트가 돌아가긴 돌아갔다.

오히려 이러한 현상에 반대하여 발생한 세컨드 임팩트가 훨씬 더 충격적이다.


세컨드 임팩트

1. 신분체계의 등장: 천민 SM/SI, 평민 스타트업

구로, 가산 디지털 단지로 규정되는 SM/SI는 험한 일, 오래된 일, 수준 낮은 일로 치부되었다. 강남/판교로 규정되는 스타트업은 평타는 치는 일, 가능성이 있는 일로 치부되었다.

흥미로운 일은 SM/SI가 대한민국 IT 산업의 60~70%를 차지하고 있고, 적어도 이들은 적자 상태나 한계 상태에 몰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스타트업 흐름은 계급적 사고방식으로 기존 업계와의 다름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2. 모르면 새롭다

최근 기성세대에게 스투시 왜 입고 젊은 척하냐는 영상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야. 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입었어."

PMBOK을 알고 에자일을 말한다면 상관없다. 문제는 프로젝트 관리를 모르면서 에자일을 말하는 희한한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청조


에자일에 대한 몰이해

에자일은 방법론인가? 철학인가?

에자일은 철학이다. PMBOK은 방법론이다.

차이는 명확하다. PMBOK은 방법론이기 때문에 충실히 따라하면 최소한의 결과를 보장한다. 에자일은 철학이기 때문에 사유하는 사람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에자일이 유명해진 것은 아마 세일즈포스 때문일 것이다. 세일즈포스가 에자일을 도입해 제품 출시 속도가 향상되었다는 이야기가 한때 유행했다. 생각해보자. 세일즈포스의 개발자와 LG전자의 개발자. 지금 작은 스타트업의 개발자. 나아가 조직의 차이, 의사결정자의 차이까지. 이들이 동일한 수준에서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

심지어 나만 해도 스타트업씬에 와서 말이 너무 안 통해 초반에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업계에 유명한 동생에게 조언을 구했다.

OO아. 너는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일하나?

형. 10명 중에 8-9명은 못쓴다고 보면 돼요. 그 한두 명이 캐리하는 거죠.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에자일의 핵심은 투명성이다. 내가 못하는 것이더라도 내부에서 이슈화하고 건전하게 조직 내에서 처리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래서 에자일을 적용하면 스크럼 마스터는 중심극한정리를 경험하게 된다. 조직 개인 역량의 도수 분포가 어디로 수렴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일 못하는 놈은 일을 감추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말을 안 하는 놈, 아프다고 하는 놈, 불편한 기색을 뿜는 놈. 남이 하는 일은 듣는 척만 하고 자기만 잘하는 것으로 보이려 애쓴다. 쉬운 KPI를 세우고 쉽고 좋은 일만 하려 한다.

LG전자에서도 스타트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에자일을 도입했으니 수평적 관계를 강조하고, 이전처럼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아침에 하하하 웃으면서 업무 공유를 하고 시작하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개판이 되어갔다. 쌓이는 티켓을 보면서 관리자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결론적으로 에자일은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준비된 사람들만 할 수 있다. 이것은 잘난 사람들의 사고 체계의 행동 교집합일 뿐이다. 그들이 정해지지 않은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서 기존 방식의 장점을 포기하고 그들만의 조직력을 구사하기 위한 스핀오프란 말이다.

그래서 내가 에자일에 대해 자주 쓰는 비유가 있다.

서울대 입학생들의 평균 수면 시간을 측정했더니 최대 4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 반 학생들을 모두 4시간 이하로 수면을 제한해야겠다.

이게 에자일을 방법론으로 바라보면 벌어지는 일이다.

실제로 에자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문제를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일처럼 자율적으로 심도 있게 들여다보고, 그 결과를 자유롭게 공유하면서 답을 찾는 과정이다. 스크럼을 짜고 스프린트를 돌려야만 에자일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의 스크럼은 정반대이다. 방법론으로서의 행태만 중요하고 본질적 의미는 사라진다. 초등학생의 지식 함양을 위해 책을 많이 본 학생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했더니, 학생들이 얇고 글씨가 큰 책만 봤다는 미국의 실패한 정책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생각해보자.

A와 B는 사이가 나쁘다. 오전 스크럼에서 두 사람은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겠는가?

A는 백엔드 개발자이다. 실력이 좋지 않아 자주 실수한다. 이 사람이 자신의 실수를 제대로 이야기하겠는가?

C는 자존감이 매우 낮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두려움이 크다. 이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공유하겠는가?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면 에자일은 방법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군대에서도 상명하복을 근간으로 하는 인사관리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흔히 스타트업은 전쟁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소꿉장난 같은 것을 기반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다.

돌격 앞으로! 지금 가고 싶은 사람만 가볼까?


K-에자일의 정체

정리하겠다.

워터폴은 인간이 수십 년간 실패하고, 고치고, 다시 실패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토목공사의 공정 관리와 군대의 인간 관리를 합쳐 가장 효율적인 형태로 다듬은 결과물이다.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를 전제로 설계되었다는 뜻이다.

한국은 그 워터폴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 빨리빨리, 대충대충, 끼리끼리. 그렇게 만들어진 K-워터폴은 부작용이 많았지만 적어도 욕망이라는 연료로 굴러가긴 굴러갔다.

그런데 K-워터폴이 싫다고 가져온 것이 에자일이다. 문제는 에자일을 가져온 사람들 상당수가 워터폴이 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PMBOK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워터폴을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말한다. 스투시를 90년대부터 입던 사람한테 왜 젊은 척하냐고 묻는 꼴이다.

에자일은 철학이다. 잘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사고방식의 교집합이다. 그것을 방법론이라고 포장해서 준비되지 않은 조직에 이식하면, 서울대생의 수면 시간을 모든 학생에게 강제하는 꼴이 된다. 투명성을 전제로 하는 체계를 투명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면, 하하하 웃는 아침 스크럼과 개판이 되어가는 사무실만 남는다.

K-워터폴은 워터폴의 형식을 가져오고 본질을 버렸다. K-에자일은 에자일의 형식을 가져오고 본질을 버렸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형식만 바꿔가며 본질을 외면하는 것. 그것이 K-에자일의 정체이다.

발전을 위해서 비판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적으로 몰린다. 에자일을 비판하면 구시대적 사고라고 하고, 워터폴을 옹호하면 꼰대라고 한다. 그러면서 정작 둘 다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둘 다 해봤고, 둘 다 실패하는 것도 봤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에자일이 아니다. 워터폴도 아니다. 형식을 가져오면 본질이 따라올 거라는 믿음이다. 양잿물을 마시면 미국인이 될 거라는 믿음과 다를 바가 없다.

양키

3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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